나창헌 의술 대신 폭탄을 든 독립운동가, 철혈단과 병인의용대
나창헌, 그는 누구인가? 의학도의 꿈을 접고 조국 독립의 불꽃으로 뛰어든 인물! 철혈단과 병인의용대를 이끌며 일제에 맞서 싸운 그의 삶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뜨겁게 장식하고 있다. 폭탄 투척 의거, 친일 밀정 처단 등 그의 의열 투쟁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지금 바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 청년 나창헌, 3.1 운동의 함성 속에서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다
1896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난 나창헌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며 의사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1919년 3.1 운동의 거대한 물결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이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는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이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 임시정부와 연계한 국내외 활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고종황제의 아들 이강 공과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돕는 등 위험천만한 임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시기 나창헌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치밀한 전략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2. 철혈단의 결성: 무장 투쟁의 기치를 높이다
2.1. 대동단 활동과 무장투쟁의 필요성 인식
1920년 상해로 건너간 나창헌은 대동단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는 대동단 활동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당시 임시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한 그는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2. "총과 칼과 혈!" 철혈단의 탄생과 무장투쟁 노선 천명
결국 그는 철혈단을 결성하고 " 총과 칼과 혈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 "라는 강렬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것은 당시 임시정부의 온건 노선과는 차별화되는, 나창헌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한 외교적 노력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믿었고, 무력 투쟁을 통해 일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강경한 투쟁 노선은 이후 병인의용대 활동으로 이어지며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3. 병인의용대, 의열 투쟁의 선봉에 서다
3.1. 정위단 조직과 병인의용대 결성: 의열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다
1925년,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오른 나창헌은 독립운동가의 기강 확립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정위단을 조직한다. 정위단은 독립운동가 사칭 범죄를 방지하고 동포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아가 그는 정위단을 모태로 병인의용대를 결성, 의열 투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병인년(1926년)에 조직되었기에 '병인의용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3.2. 상해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의거: 일제의 심장부를 겨냥하다
병인의용대는 1926년 4월, 9월, 그리고 192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상해 일본총영사관을 겨냥한 폭탄 투척 의거를 감행했다.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의거들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창헌은 목숨을 건 의거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3.3. 친일 밀정 처단: 독립운동의 내부 적을 제거하다
나창헌은 대외적인 투쟁뿐 아니라,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주력했다. 병인의용대는 친일 밀정들을 처단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대표적으로 정보 유출로 독립운동에 큰 피해를 입힌 박제건을 처단한 사건은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창헌은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외적인 투쟁만큼이나 내부의 단결과 정보 보안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4. 한국노병회 활동과 임시정부에서의 활약: 멈추지 않는 독립운동
나창헌은 철혈단과 병인의용대 활동 외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2년에는 한국노병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 모집과 노병 양성에 힘썼다. 또한,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탄핵을 주도하는 등 정치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단순한 무력 투쟁을 넘어 독립운동의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고 이끌어가는 지도자였다.
5. 나창헌의 마지막 투쟁과 그의 유산
5.1. 흥사단 원동대회 참석과 병인의용대 재건: 건강 악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투쟁 의지
1933년,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나창헌은 흥사단 원동대회에 참석하고 병인의용대를 재건하는 등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의 투쟁 정신은 재건된 병인의용대에 의해 계승되어 등정 경부보 암살 기도 등 지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향한 염원을 간직하며 1936년, 위암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5.2. 나창헌의 독립운동 정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나창헌의 삶은 의열투쟁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는 의사라는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조국 독립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그의 헌신적인 삶과 업적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나창헌의 투쟁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로 기억될 것이다.